작성일 : 13-02-10 13:23
東洋學의 최고수-남회근(南懷瑾) 선생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1,963  
20112년 타계하신 남회근 선생은 儒佛道와 文史哲에 그야말로 달통한 양반이다.
현재 한자문화권을 대표하는 석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대 중반에는 四川성의 아미산에 들어가
3년 동안 閉關 수련을 경험한 도인이기도 하다.

이런 물건(?)은 중국에서도 수백 년 만에 나올까 말까 한 인물이다.
남회근은 ‘논어강의’(송찬문 번역)에서 유불도를 이렇게 비유했다.


“佛家는 백화점과 같다. 수많은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다.
구경하다가 물건을 사도 좋고, 안 사도 되지만
사회는 백화점을 필요로 한다.

道家는 약방과 같다. 병이 나지 않으면 안 가도 되지만,
병이 나면 가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 
도가에는 兵家, 縱橫家, 천문, 지리가 모두 포함돼 있다.

儒家는 양곡가게와 같다.
공맹사상은 우리가 매일 먹어야 하는 식량과 같다.”



남회근 (南懷瑾)

1918年 浙江 온주(溫州)의 대대로 학문을 하는 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서당식 교육을 받았고 12~17세까지는 제자백가를 섭렵했다.
소년 때는 무술을 수련하고 문학, 서예, 의약, 역경, 천문을 두루 익혔으며,
청년 때는 隱士들을 방문하면서 그들로부터 널리 전해지지 않던 법문을 배웠다.

2차대전이 발발하자 선생은 四川에 들어가 중앙군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금릉(金陵)대학 연구소에서 사회복지학을 연구했다.
이후 그곳을 떠난 후에는 전문적으로 불교 공부에 몰두했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3년간 <대장경>을 독파했고, 
1945년에는 티베트에 들어가 密宗의 大德들을 방문하고
白敎, 黃敎, 紅敎, 花敎 등 티베트 각 파로부터 인정을 받아
밀종의 대덕으로 떠받들어지기도 했다.

티베트를 떠나 昆明으로 가서는 한때 雲南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다시 사천대학으로 옮겨 교편을 잡았다.

그러다 1947년 항일전쟁이 끝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생활을 하다가
1948년 봄에 대만으로 건너갔다. 그 후로부터 文化大學, 輔仁大學 및 기타 연구소에서
강의와 수련 저술에 몰두해 왔으며,

현재는 홍콩에 거주하면서 대만과 대륙 간의 교류 및 협력사업에 몰두하고 있다
정말 아쉬운 것은 그에 저서들이 국내에 번역된 것이 드물다는 것이다.



대만의 國師 남회근


무협지를 읽으면서 그 필요성을 절감했던 두 가지 단어가 ‘師傅’와 ‘內功’이라는 용어였다.
인생 기로에 직면할 때마다 찾아 뵙고 상의드릴 만한 사부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일은 벌여 놓았지만 막상 뒷감당을 못할 때마다 나의 내공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한다. 내공을 갖춘 사부가 과연 어떤 인물일까. 그런 사람이 바로 國師이다.

근래 20~30년 동안 대만에서 국사 대접을 받고 있는 인물이 남회근(1918~)이다.
장개석과 장경국이 국사로 모셨고, 지금도 나라 안팎의 중대 사안이 있을 때마다
정계와 재계의 지도자들이 자문을 하고 있는 어른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전통 고전들을 섭렵하면서 여러 분야의 대가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는 복을 누렸다. 유·불·도의 경전뿐만 아니라
그 수행방법에도 두루 통달하였으며,

10대 중반에는 무술 사부를 만나 검술에도 조예가 깊다.
20세 무렵에는 사천성의 아미산에 들어가 폐관(閉關) 수련을 한 바 있다.
산에서 내려와 항일운동에도 참여하였으며, 국공내전이 벌어지자
티베트로 들어가 2년 동안 대장경을 공부하였다.


이후에 국민당 정부를 따라서 대만으로 들어와 중국의 전통문화와 고전들을
강의하면서 제자들을 양성해 왔다. 오천 년 중국문화의 정수를 한 몸에 지니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넓이와 깊이를 겸비한 인물이다.

그는 모택동 정권이 들어설 때,
“대륙도 50년 후면 다시 전통으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예언을 한 바 있고,
그때를 위해서 50년을 준비했다는 설이 있다.

그가 저술한 ‘주역강의’, ‘논어강의’를 비롯한 30여종의 저술들은
문화혁명으로 전통문화가 깡그리 사라진 중국 본토의 대학생들에게
전통의 향기를 회복하게 해주는 교과서로 읽히고 있다.


그는 1992년에 자신의 고향인 절강성 溫州 에다가
자신을 따르는 화교의 재력가들을 동원하여 철도를 개설한 바 있고,
이때부터 장쩌민을 비롯한 본토 실세들과의 신뢰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번에 후진타오와 롄잔의 ‘국공회담 5개항 합의’를 보면서
그가 배후에서 어떤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을 해 본다.
왜냐하면 국민당과 공산당 양쪽에서 모두 존경을 받고 있는 국사이기 때문이다.


직관과 영감을 강조하다 보면 일관성이 결여되기 쉽고,
논리와 분석을 중시하다 보면 비약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남회근은 특이하게도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추었다.

20대 초반에 사천성의 아미산에서 閉關 수련을 하면서
‘우주와 자기 자신이 하나 되는’ 돈오(頓悟) 체험을 이미 하였고,
이후로 수십 년의 세월 동안 한자문화권의 천재들이 남겨 놓은
방대한 고전들을 차근차근 섭렵하였다.

모든 고전이 그렇지만 동양의 고전들도 그것을 읽는 사람의
정신적 깊이에 따라 해석의 층차가 각기 다르게 나타나기 마련이다.
돈오를 체험한 그의 고전해석은 남다른 바가 있다.


‘역경’에서 말하는 ‘천일생수 지육성지(天一生水 地六成之)’에 대해서,
‘우주의 첫 시작이 물이며 지구가 형성된 이후는
공간이 사방과 상하로 나누어진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지이생화 천칠성지(地二生火 天七成之)’에 대해서,
‘지구가 형성된 후 회전하고 마찰함으로써 발생한 전기에너지가
하늘의 북두칠성과 연결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제갈공명의 장인이었던 黃承彦과 스승인 龐德이 모두 뛰어난 은사들
이었다고 설명한다. 역사적 전환기에 자신들은 무대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공명과 같은 뛰어난 제자를 무대 위로 내보냄으로써 역사를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역사를 바꾸면서도 이들 은사는
전혀 그 역사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런가 하면 춘추(春秋)의 의미에 대한 설명도 기막히다.
봄철 3월과 가을철 9월에 드는 춘분·추분 두 절기만이 경도·위도상으로 볼 때
태양이 황도(黃道) 중간에 이르는 때여서, 밤낮의 길이가 거의 같고
기후도 춥지도 덥지도 않아 온화하다.
바로 춘분과 추분의 이 평형성 때문에 역사를 ‘춘추’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문화혁명을 겪으면서 족보 없는 문화가 되어 버린 대륙에서는,
남회근이라는 사부를 통해서 자신들이 잃어버린 정신적, 문화적
정체성을 회복해 가고 있는 중이다.

그는 1980년 홍콩에다 ‘시방총림서원(十方叢林書院)’이라는 살롱을 설립하였다.
올해 90세의 고령이지만 기경팔맥(奇經八脈)이 뚫린 건강한 몸으로
찾아오는 명사들과 학인들을 만나고 있다고 한다.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Me2Day로 보내기 게시글을 요즘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구글로 북마크 하기 게시글을 네이버로 북마크 하기